1. 수사·재판 결과와 진실 불일치 이유
피의자든, 고소인이든 사건관계인들이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는 ‘법대로 해주세요’일 것이다. 법대로 수사하고 재판하면 자신의 억울함이 풀릴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진실은 밝히기 어렵고, 사건관계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때론 객관적 증거의 부족으로, 때론 사건관계인들의 거짓말 때문에, 때론 법률의 미비로, 때론 수사관, 검사나 판사의 무능이나 편견 때문이다. 이제 많이 줄었지만, 사법 종사자들의 부패로 인한 경우도 있다.
2. 일본 영화, 라쇼묭 : 사무라이 죽은 이유?
과연 진실이 있기나 한 것일까. 잠시 일본 영화 <라쇼몽>(1950)을 살펴보자.
사무라이와 아내가 숲속을 걷다가 산적에게 속아 사무라이는 결박당하고 아내는 겁탈당한다. 이후 사무라이는 칼에 찔려 숨져 있고 아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무라이가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현장을 목격한 나무꾼의 신고로 관청에서 심문이 벌어지게 된다.
산적 : 겁탈한 것은 사실이나, 사무라이를 풀어주고 정당하게 결투를 벌여 죽인 것이다.
아내 : 겁탈당한 후, 남편이 자기를 경멸하기에 흥분하여 남편을 죽였다.
사무라이(무당의 도움으로 신이 내림) : 겁탈당한 아내가 배신하여 자결했다.
나무꾼 : 여자가 겁탈당한 후 싸우기 싫어하는 두 남자를 부추겨 결투를 붙여놓고 도망쳤고, 두 남자는 비겁하고 용렬하게 싸우다가 그만 사무라이가 죽었다.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나무꾼의 증언이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나무꾼도 현장에 떨어져 있던 비싼 칼을 집어 간 일이 있는데 그의 말을 고스란히 믿어도 될까? 이렇듯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게 사람의 속성일까. 우리 속담에도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3. 치과의사 모녀 피살사건 : 남편 범인 여부?
실제 있었던 사건을 살펴보자. 1995년 6월 세간을 뒤흔들었던 ‘치과의사 모녀 피살사건’이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 7층에서 연기가 나오자 119 신고로 소방관들이 도착했는데, 목욕탕 욕조에서 어느 외과의사의 부인인 치과의사와 2살 딸아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부인과 아이 모두 목이 졸린 흔적이 있었고, 욕조에 온수가 가득 차 있었으며, 화재는 안방 장롱에서 시작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부인은 팬티가 무릎 부분에 걸쳐져 있는 등 마치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파트 현관이 잠겨 있었고, 달리 외부로부터의 침입 흔적이 없었으며, 집안에 현금, 귀중품은 그대로였고, 집을 뒤진 흔적도 없었다. 부인과 내연관계로 의심받던 실내장식 업자는 사건 발생 시간에 다른 곳에 있었던 게 확인돼 알리바이가 입증되었다.
자연스레 외과의사인 남편이 출근 전에 범행을 저지르고 치밀하게 증거를 인멸한 뒤 외부인의 소행인 것처럼 꾸몄다고 의심받게 되었다. 남편은 당일 출근하기 위해 7시에 집을 나설 당시 모녀가 살아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그 전에 모녀가 사망했다면 남편이 범인이고, 그 후에 사망했다면 남편은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가름 되는 상황이었다.
제1심을 담당한 서울서부지방법원은
① 사람이 죽은 후 중력에 의해 피가 아래로 쏠리는 시반(屍斑)이 형성된 점에 비추어 사후 6~8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모녀의 사망 추정 시간은 오전 3:30부터 5:30 사이가 되는 점,
② 사람이 사망한 후 일정 시간이 흐르면 시신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사후경직이 생기는데, 이미 손가락에 사후경직이 진행된 상태로 사후 6~12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이고 그럼 모녀의 사망 추정 시간은 전날 23:30부터 당일 5:30 사이가 되는 점,
③ 부인의 위 내용물 소화 상태에 비추어 저녁을 먹은 후 아침을 먹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
④ 제3자의 침입이 불가능하고 침입 흔적이 없는 점,
⑤ 안방의 장롱에 불을 질러 서서히 퍼지도록 하여(‘지연발화’) 출근 후에 화재가 난 것처럼 위장하려 한 점 등을 근거로 유죄로 판단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항소심을 담당한 서울고등법원에서는
① 시반과 사후경직에 의한 사망시각 추정에 오차가 있을 수 있는 점,
② 시반이 시신 일부에만 형성되어 있는 점,
③ 욕조 물 속에서는 수압이나 온도에 따라 시반과 사후경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점,
④ 위 내용물의 소화 정도와 식사 시간에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는 점,
⑤ 화재 자체는 남편의 출근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점(지연발화를 인정하지 않음) 등을 제시하며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런데 대법원에서는 유죄 가능성을 전제로 심리 미진을 이유로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내려보냈다. 서울고등법원은 스위스 법의학자에 대한 증인신문, 화재 재현 실험 등 심리를 더 진행한 끝에 여전히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무죄를 선고하였고, 이번에는 대법원이 항소심 판단을 받아들여 무죄가 확정되었다. 무려 7년여 동안의 재판 결과였다.
4. 무죄 선고 의미 : 증거 없거나 부족 의미
그럼, 외과의사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형사재판에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 판단하며, 유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beyond a reasonable doubt) 증명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무죄 선고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은 아니다.
1995년 11월 일어난 ‘가수 김성재 사망 사건’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살인범으로 지목된 그의 여자친구에 대해 1심에서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히고,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 외에도, ‘이태원 살인사건’,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모티브가 된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 각종 유괴살인 사건, 군 의문사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이 우리를 미궁과 혼란에 빠뜨린 바 있다.
5. OJ 심슨 사건 : 본인 범인 여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의 ‘OJ 심슨 사건’은 어떨까? 1994년 6월 미식축구선수 출신의 흑인 배우인 심슨(O. J. Simpson)의 전 아내인 백인 여배우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녀의 애인이 로스앤젤레스의 고급 저택에서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경찰 수사를 통해 심슨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심슨은 이른바 ‘드림 팀’이라 불리는 변호사들에게 50억 원을 들여 사건을 맡겼고, 변호인들은 전국에 생중계된 재판에서 ‘인종차별적인 백인 경찰관들이 흑인인 심슨에게 불리한 증거를 조작하거나 증거를 오염시켰다’고 계속 주장하였는데, 이는 2년 전에 벌어진 ‘LA 흑인폭동 사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실제로 범행 현장에 처음 도착한 백인 경찰관이 평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온 게 확인되었고, 경찰관들이 보호덮개도 없는 신발로 범행 현장을 드나들었으며, 현장에 있던 중요증거인 피 묻은 심슨의 장갑을 최초에는 발견하지 못한 게 드러났다.
결정적으로는, 검사의 요구로 심슨이 법정에서 위 장갑을 끼어보았지만 작아서 잘 들어가지 않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피가 잔뜩 묻은 가죽장갑이 보관 과정에서 수축하였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검사들이 당황하였는지 그런 주장을 펼치지도 못했다. 결국 변호인들의 전략이 먹혀들어 배심원들은 심슨에 대하여 무죄 평결을 내렸다.
이때 12명의 배심원 중에 인종별로는 흑인이 9명, 히스패닉이 1명, 백인이 2명이었고, 성별로는 여성이 10명, 남성이 2명이었다. 따라서 배심원들의 인종 구성 때문에 무죄가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제기되지만, 위와 같이 재판상 드러난 증거 문제에 비추어 배심원 구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니콜의 유가족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는 심슨이 패하여 손해배상금 850만 달러와 함께 징벌적 배상금으로 250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되어야 유죄가 선고되는 형사사건과 우월적 증거가 있으면 승소가 가능한 민사사건은 성격상 달리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양 사건의 상반된 결과는 외견상 모순되어 보이므로 OJ 심슨 사건은 배심제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사례로 곧잘 거론되기도 한다.
6. 무죄 대비하는 습관 : 만일 대비하여 진실 기록하는 습관 필요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살인사건조차도 진실을 확정하기가 이토록 어려운데, 다른 수많은 사건이야 오죽하겠는가. 불행한 일을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 세상사 알 수 없으니, 만약에 대비하여 스마트폰과 IT기술 등을 활용하여 자신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남겨두는 것도 좋겠다. 범죄예방 효과도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이다.
-출처-
2023. 11. 15. 법률신문, 임관혁 검사장 (대전고등검찰청)
https://blog.naver.com/duckhee2979/223608885221(재평가되는 솔로몬 재판, 춘향전 결정, 베니스상인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