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검사같은 판사
(1) 영화 박열
‘박열’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황태자를 폭사시키려다 발각되어 처벌받은 ‘박열’이라는 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한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일본인 판사가 박열을 신문하는데 검사와 똑같이 한다. 얼핏 보면 검사라고 착각할 정도다.
공개된 법정이 아니라 폐쇄된 조사실 같은 곳에 판사, 입회서기, 피고인만 있다. 검사도, 변호인도, 방청객도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 비밀스런 공간에서 판사가 피고인을 신문하는 게 이상해 느껴진다. “검사가 할 일을 왜 판사가 할까?” “판사가 재판을 저런 식으로 해도 되나?”라는 의문이 생긴다.
(2) 판사도 예비재판에서 피고인 신문
이 절차가 ‘예심재판’이다. 예심은 비공개 재판이다. 예심제도가 없는 한국에서는 ‘재판=공판’이라는 인식이 강해, 재판이라고 하면 공판정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래서 ‘비공개 조사=수사’, ‘공개심리=재판’이라는 식의 착각을 한다.
(3) 대륙법계 형사절차
대륙법계 형사절차에서 국가기관이 수행해야 할 기능은 3가지가 있다. ① 범인과 증거를 탐색하고 법원에 제출하는 것, ② 범인과 증거를 조사하는 것, ③ 밝혀진 사실에 법률을 적용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①은 검사가 담당하는 수사, ②, ③ 은 예심판사와 법원이 담당하는 재판이다.
1808년 프랑스의 치죄법 제정 당시 검사에게도 ② 의 기능을 부여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소추권은 검사에게, 조사권은 판사에게”라는 원칙이 확립되어 대륙법계의 전통이 되었다. 대륙법계 국가에서 피고인을 신문하고 사건의 실체관계를 조사하는 권한은 판사에게 있다. 검사는 판사의 권한행사를 촉구하고, 감시하고, 이의를 제기할 뿐 직접 사법적 조사행위를 할 권한이 없다.
“검사가 할 일을 왜 판사가 할까?” “판사가 재판을 저런 식으로 해도 되나?”라는 의문은 근대 형사법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해다. “한국에서는 왜 판사가 할 일을 검사가 할까?” “검사가 수사를 저런 식으로 해도 되나?”라는 의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2. 판사같은 검사
(1) 근대 형사법은 조사절차 판사전담
근대 헌법은 개인의 자유를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하고, 근대 형사법은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가 형사절차에서 침해되지 않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형사절차에서는 강제처분이 불가피하고, 강제처분은 인권침해의 위험이 크다. 불가피하지만 인권침해의 위험이 큰 조사절차를 공정한 판사에게만 맡기고, 검사에게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2) 예심재판에 대한 비판
그런데 20세기 초부터 예심재판의 장기간 미결구금이 그 자체로 인권을 침해한다는 불만이 커졌고,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서 예심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영향으로 한국은 1954년 예심제도를 폐지했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1954년식 수사구조가 생겼다. 과거에는 판사가 조사하고 검사는 감독했지만, 이제 검사가 조사하고 판사는 감독하는 구조가 되었다.
(3) 독일, 판사와 검사의 역할교체
독일도 1974년 한국처럼 형소법을 개정했는데, 독일에서는 이런 현상을 “역할교체” (Rollentausch)라고 부른다. 비유하자면 감독역할을 하던 검사가 선수로 뛰고, 선수역할을 하던 판사가 감독을 하는 것이다. ‘판사처럼 행동하는 검사’가 탄생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70년 이상 이 구조에 익숙해져 이게 원래 대륙법계 수사구조라고 착각하는 점이다.
(4) 사법적 구조를 착각한 결과
원래 검사가 선수로 뛰고(조사를 하고), 원래 판사가 감독을 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영화 ‘박열’에서처럼 원래 판사가 할 일(사법적 조사)을 판사가 하는 게 이상해 보인다. 오히려 판사가 할 일을 검사가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판사가 해야 할 일을 경찰이나 중수청 수사관이 해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문제 상황에서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3. 판사같은 경찰
(1) 한국은 경찰이 예비재판권 행사
한국은 2020년 형소법 개정으로 경찰이 독자적으로 피의자와 증거를 조사하고, 증거를 평가하고, 법률을 적용하여 사건을 계속 진행 여부를 결정한다. 사법적 조사권한(예심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한국과 달리 프랑스는 아직 예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 경찰이 행사하는 수사권을 프랑스 예심판사가 행사하는 예심재판권과 비교해보면 한국 경찰이 행사하는 수사권이 예심재판권과 같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 프랑스 예심판사
프랑스의 예심판사는 ① 예심피고인을 신문하는 등 사건을 조사할 권한이 있다. ② 구속하는 경우에는 단독으로 예심피고인을 구속하지 못하고 석방구금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③ 조사가 끝나면 증거를 평가하고, 면소결정으로 스스로 절차를 중단시킬 수 있다. ④ 공판을 개시하려면 스스로 개시를 결정하지 못하고, 사건을 고등법원 예심부에 송치한다. 그러면 예심부가 공판개시 여부를 결정한다.
(3) 한국 경찰은 프랑스 예심판사 권한 행사
한국의 경찰은 ① 피의자를 신문하는 등 사건을 조사할 권한이 있다. ② 구속하는 경우에는 단독으로 피의자를 구속하지 못하고 검사를 통해 영장전담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③ 조사가 끝나면 증거를 평가하고, 불송치결정으로 스스로 절차를 중단시킬 수 있다. ④ 공판을 개시하려면 스스로 개시를 결정하지 못하고, 사건을 검찰청 검사에게 송치한다. 그러면 검사가 공판개시 여부를 결정한다.
이처럼 한국의 경찰은 프랑스 예심판사와 기본적으로 같은 권한을 행사한다. 다른 점이라면 프랑스에서는 예심판사가 행사하는 재판권(사법권)이고, 한국에서는 경찰이 행사하는 수사권(행정권)이라는 점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한국에서는 왜 판사가 할 일을 경찰이 할까?” “경찰이 수사를 저런 식으로 해도 되나?”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4. 기적을 행하는 헌법재판소
(1) 신판의 형사재판
중세 초기 유럽에서는 신판(Ordeal)의 방식으로 형사재판을 했다. 끓는 기름에 손을 넣은 후 헝겊으로 손을 감싸고 며칠 후에 헝겊을 풀어 상처가 나았으면 무죄, 그렇지 않으면 유죄로 판명하는 식이다. 이때 가톨릭 교회 사제들이 기름 같은 시련도구를 축성한다.
(2) 신판에 대한 불신
축성을 통해 세속적인 물건인 기름은 신이 의지를 표현하는 신성한 물건으로 변화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생기고, 사제들에 대한 불신이 점점 커지자, 1215년 교황은 가톨릭 사제들이 신판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더 이상 신판을 할 수 없게 되자, 이후 형사재판은 증거, 증언을 조사하여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3) 중세 프랑스, 행정과 형사사법 미분리
중세 프랑스에서는 국왕의 행정관이 하급심을 담당하고, 국왕의 자문기관인 파를레망이 최종심을 담당하여 행정과 형사사법의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1522년 프랑수아 1세의 칙령에서 형사법관(lieutenant criminel) 제도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고, 1552년 앙리 2세의 칙령에 그 권한이 명시되어 재확인되었다.
형사법관은 예심재판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식 규문재판을 시행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수사, 예심, 공판의 권한을 분리하여 1명의 사법관이 모든 절차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때 사법적 조사권한은 예심판사에게 부여되고, 검사에게는 부여되지 않았다.
(4) 형사사법권과 행정권 분리는 오늘날 판사제도
정리하면 원래는 행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지 않았지만, 대략 500년 전부터 형사사법권이 행정권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이때부터 사법적 조사권한은 줄곧 판사가 행사했다. 프랑스는 지금도 예심판사가 행사한다. 그 권한은 본질적으로 사법권에 속한다.
반면 같은 행위를 한국에서는 일반행정기관인 경찰관이 행사하고 그 권한은 본질적으로 행정권에 속한다. 같은 권한이 프랑스에서는 사법권, 한국에서는 행정권이 되기 위해서는 이 행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기적이 필요하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미사 때 사제가 빵과 물을 축성한다. 빵조각과 물을 들고 “이것은 그리스의 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세속의 빵과 물이 신성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그 본질적인 성격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
(5) 사법적 조사행위가 본질적 행정행위로 변성
2023년 헌법재판소는 사법적 조사행위를 축성하는 기적을 행했다. “이것은 본질적 행정행위다”라는 선언을 통해(헌재 2022헌라4) 500년 동안 법원의 재판행위였던 사법적 조사행위가 일반행정기관이 수행할 수 있는 본질적 행정행위로 변성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래서 현재 한국에서는 경찰이 예심판사의 권한을 행사한다.

5. 오늘날 검찰개혁, 수사와 기소의 분리 입법
검찰청을 폐지하고, 중수청을 신설하려는 입법도 헌재의 이 결정에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헌법재판소가 기적을 일으키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나?”
지금 우리는 800년 전, “사제의 말 몇 마디에 끓는 기름의 본성이 성스럽게 변할까?” 의심하던 중세인들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과연 헌재의 선언으로 사법행위의 본성이 행정행위로 변할까?”

-출처-
2025. 9. 8. 김성훈 부장검사(청주지검)
https://solomon24.kr/★-수사·기소-분리-주장은-형사소송구조-개념-혼동